자전거 여행, 김훈, 삶의 옹골진 풍경을 담다
옹골진 삶의 풍경을 담아내다.
삶이 무엇일까? 알 길이 없다. 적지 않게 살았지만 삶은 여전히 미궁이다. 어쩌면 나이가 들수록, 삶을 고민하면 할수록 미로에 갇힌 느낌이다. 그러다 가끔 꺼내드는 책이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다. 이 책은 언제 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몇 번을 샀을 것이다. 책이 한 권이 아니다. 시골에도 있고, 도심 깊은 월세방에도 있다. 그리고 또 펼쳐지지 않은 이삿짐의 어느 박스에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사를 다니면서 책이 보이지 않으면 구입하기를 반복했던 탓이다. 하지만 제대로 읽어 본 적이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단 한 번도 끝까지 읽어 보지 않았다. 아니 읽지 않는다. 아껴 읽고 싶어서이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이다. 물론 책은 모두 읽었다. 하지만 단 번에 읽지 않을 뿐 아니라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한다. 김훈의 문장은 아리다. 아프고 옹골지다. 쉽게 씹으려하다가 이가 상하기 십상이다.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
책의 성향이 모호하다. 여행 글인지 에세이인지 기행문인지 경계를 나누기가 힘들다. 하지만 모호함은 독자들에게 의미가 없다. 글 안에 풍경과 역사, 삶을 옹골지게 담아 낸 덕분에 읽는 내내 고즈넉한 산사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경강 저녁 갯벌과 거기에 내려앉은 도요새들의 이야기를 쓰던 새벽 여관방에서 나는 한 자루의 연필과 더불어,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의 절벽 앞에서 몸을 떨었다. 어두워지는 갯벌 너머에서 생명은 풍문이거나 환영이었고 나는 그 어두운 갯벌에 교두보를 박을 수 없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책은 2007년 생각의 나무에서 발행된 책이다. 이 책은 이후에 문학동네로 옮겨 2권으로 분권된다. 나는 이 책도 문한동네의 책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모두 세 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첫 책이라 그런지 수더분한 표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초판본이 참 좋다. 이후 글은 수정되고 사진도 더 많이 들어갔음에도 말이다. 어쩌면 책이 처음 나왔다는 것과 좀 더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좋을 수 있다. 덜 다듬어진 털털함이 묻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학이란 무엇일까? 좋은 문장의 요소를 뭘까? 애써 궁리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본질에 충실해야하며, 존재의 심연을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꽃피선 해안선' 여수 돌산도 향일암)
김훈의 수사학은 어설픔에서 나오는 설익은 문장이 아니다. 고뇌하고 존재에 침전하여 얻은 통찰을 길어올린 문장이다. 그래서 화려함과 가벼움을 표현하지만 묵직하게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뻘에는 수억만 개의 구멍이 있다. 갯지렁이는 구멍 위로 머리를 내놓고 신다. 이 구멍들이 뻘에 공기를 불어넣어 갯벌은 숨 쉰다. 그것들이 살아가는 꼴에는 이 세상 먹이사슬 맨 밑바닥의 비애와 평화가 있다. 그리고 구태여 고달픈 진화의 대열에 끼어들지 않은 시원의 순결이 있다. (만경강에서 , 옥구 염전에서 심포리까지)
내가 쉬이 이 책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유다. 그 시원의 자리에서 치열한 생존을 이루어가는 뻘이 우리의 삶의 풍경을 그려낸다. 저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밑바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읽고 읽어도 좋을 책이다.
'북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25 전쟁 대중가요 (0) | 2023.06.21 |
---|---|
대중 가요 가사, 삶을 노래하다 (0) | 2023.02.09 |
논리적인 글쓰기 방법 (0) | 2023.02.09 |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1000가지 (1) | 2023.02.09 |
댓글